그는 안동사람들보다 오히려 우리 전통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사진작가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장승사진이다 싶으면 장승만큼 그의 얼굴을 찾기 쉬울 정도로 장승전용 모델이 되었다. 하루에도 10여명 이상씩 찾아오고, 마구 셔터를 눌러대는 통에 작업이 제대로 안될 정도라고 한다.
드럼통에서는 장작을 태운 매캐한 연기가 피워오르고 주위에는 이미 그의 손을 떠난 장승들이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서 있다.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흰 머리를 뒤로 꼬리지어 묶고 한복차림에 나무망치를 든 그의 모습은 우리 전통의 장인 정신을 드러내기엔 더없이 제격인 것 같다. 덕분에 사진의 분위기가 휠씬 살기도 하겠지만 장승공원을 들러가는 아이들이 '할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할 정도로 40대에 할아버지로 억울하게 나이를 먹을 때도 있다.
그가 지금까지 만든 장승은 갯수만도 2백 50여개. 그 가운데 1백 50여개 정도가 장승공원에 세워졌고 나머지는 문경, 상주, 단양 인근 지역으로 나가 있다. 장승공원에는 장승뿐만 아니라 솟대와 옛사람들이 소원 하나씩을 가슴에 모으고 올려놓았을 돌무더기들을 만들어 요리 조리 잘도 배치를 한 것 같다. 이름도 나무와 돌의 동산이란 뜻으로 '목석원'이라 붙여 놓았다.
그의 고향은 하회마을 인근의 중리다. 하회마을로 오기 전까지 그곳에서 슈퍼를 경영하며 목공예와 분재를 했다. 아니 슈퍼일보다는 나무 만지는 일에 더 정신을 쏟았다. 어쨌건 그다지 평범하지 않은 사람과 같이 사는 부인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을 듯하다. 22살 나던 해에 부인 김정숙(44)씨와 중매로 만나 일찍 결혼해 벌써 대학을 다니는 남매를 둔 아버지다.
어릴 때도 총 만드는 것부터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그쪽으로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런 손재주로 한때는 이발사를 했던 적도 있었다. 이발사를 하면서 손님들 얼굴 표정을 자연스레 보게 되다보니 지금 장승의 표정을 만드는데 적잖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안동이란 동네에서 한창 팔팔하게 일할 젊은 사람이 동네 한복판을 차지하고 앉아 장승을 깍고 있는 모습이 어른들에게 그리 곱게 보일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 가장 힘든 건 아무래도 주위사람들의 시선이었겠지요. 젊은 사람이 동네 복판에서 장승이나 다듬고 있으니까 마을 어르신이나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하드라고요."
그러던 중에 고향에 있는 땅을 팔아 지금의 장승공원 자리를 사게 되었다. 좋은 고향땅을 팔고 하회마을 밖으로는 그가 처음 건물을 지었을 만큼 당시에는 형평없던 계단식 땅을 샀으니 그또한 주위 사람들의 걱정거리였다. 아마도 철없는 젊은이의 무모함 쯤으로 생각했을 법하다. 하지만 그런 젊은 호기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장승공원도 없었을 것이다.
관광객들이 보이는 호기심어린 관심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92년에 건물을 지어 하회로 옮겨 오면서 장승을 하나씩 세운 것이 150여개의 장승들이 모여사는 공원으로 만들어졌다.
어느덧 장승공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가 장승을 깍아온 세월만큼이나 다양해지고 많아졌다.
하회탈만을 생각하고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장승공원은 또다른 반가움이다.
게다가 직접 장승을 만드는 것도 보여주고 아이들이랑 같이 만들어 보기도 하는 김종흥씨의 세심함이 자칫 정형화되어 지루해지고 단조로울 수 있는 여행에 재미를 돋운다. 마치 어느 야구르트 광고에 등장했던 할아버지가 정말 살고 있고 그곳에 가면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식기 전에 장승만드는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무귀신이다. 나무귀신'하면서 만져보고 장승 앞에서 사진도 찍고 할 때면 보람을 느끼지요. 관심있어 한다는 것이니까요. 외국인들도 도자기나 칠보보다 장승이 더 한국적이라고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마을 행사가 있을 때마다 혼자서 선보이기도 했던 탈춤을 92년 하회마을로 오면서 본격적으로 전수했다. 지금은 겨울이라 쉬고 있지만 토요일, 일요일마다 매주 공연을 해왔다. 이젠 유명세를 타 해외공연도 많아져서 그가 작업을 여유있게 할 수 있는 시간도 이 소중한 겨울 뿐이다.

"제가 이곳에 와서 찻집도 하고 민박도 하면서 많은 덕을 받았다고 봐야지도. 이제는 진짜 안동을 위해 문화적으로도 한몫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뭐 문화예술인은 아니지만 제가 가진 기술로 받은 만큼 이젠 환원하고 싶어요."
그가 장승을 깍고 있는 주위에는 색다른 장승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회탈 모양의 장승.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가장 안동다운 장승이지 싶다. 이미 아홉 개의 장승들이 모두 완성되었다. 틈틈이 하회동 탈박물관의 김동표씨에게 하회탈 깍는 것을 배우러 다녔고, 장승은 또 변형이나 파괴가 가능한 만큼 작업을 하는데도 자유스럽다. 이 장승들은 이미 예약이 된 몸들이다. 이미 두 번에 걸쳐 장승공원에서 국제 탈춤 페스티발 기간에 행사를 했지만 올해는 이 장승들이 행사의 본무대인 강변으로 나간다. 강변과 어우러져 서 있을 장승들을 생각하면 괜스리 마음부터 설랜다.

"내가 깍고 세운 장승들이 하회마을 오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주고, 안동을 홍보하는데 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앞으로는 제대로 열심히 해 볼 생각입니다. "
울퉁불퉁 퉁망울 눈에 주먹코, 뽀족하게 뻗친 이빨... 어느 때는 인자한 부처님 모습을 닮은 것같다가도 어느 때는 귀신스럽게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다가, 또 어느때는 소박하고 못생긴 그대로 익살스럽고 친근한 모습으로 옛사람들이 신앙처럼 섬기기도 했던 장승이 이제 하회에서 김종흥 씨의 손에 의해 안동의 또 하나의 얼굴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우리 것이 우리 땅에 서야 하고 그래야 IMF도 극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장승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서민적이고 부드럽게 소박한 농촌 사람처럼 만들고 싶어요. 장승은 못생기면 못생길수록 정가고 재밌잖아요."

어느새 그가 만든 장승들과 구분이 안될 만틈 닮아있는 소박하고 정감있는 모습이 그가 거기 장승공원에 서 있었다.
[안동] 1999.
"장승은 표정 연출이 중요합니다. 바로 우리들의 얼굴이기 때문이지요. 길가는 사람들이나 주변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심지어는 꿈속에서까지 어떠한 표정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 때 재빨리 스케치해 두었다가 곧바로 장슫의 표정으로 재구성합니다."

"이곳이 보다 한국적인 분위기가 살아날 수 있도록 전통적
정원 양식을 도입해 명실상부한 한국의 대표적 장승공원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구상입니다. 또 앞으로는 장승마다 이름과 설명이 담긴 팻말도 부착해 관람자들의 이해를 도울 계획입니다."
"분재를 하면서 아깝게 죽어 버린 나무를 어떻게 쓸까 고심하다가 장승조각을 생각해 냈어요.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을 정도로 일가견을 갖게 된 김씨의 장승만들기는 9년전부터.. 그러나 김씨가 이처럼 장승을 만드는 고도의 예술을 지향하기까지는 10여년 동안 하회별신굿 탈놀이 보존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탈을 만들어 온 비지탐과 정열이 밑바탕이 됐다. 또 그는 장사를 하면서도 틈틈이 목공예를 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리부리한 눈매, 쫙 벌린 입, 그리고 투박한 코뭉치.... 마을 입구나 고개마루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던 장승. 오랜 세월동안 모진 비바람속에 서서 경계표나 이정표로, 잡귀나 질병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때로는 개인의 소원을 비는 대상으로 우리 곁을 든든하게 지켜준 고마운 존재이다.

비록 기독교가 뿌리내리면서 우상숭배라는 명목으로, 70년대 경제 논리에 밀리면서 하나 둘 뽑혀 사라져 갔지만, 아직도 우리와 함께 느끼며 호흡하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 입구에 조성된 장승공원은 제자리를 잃고 방황하던 장승들의 안식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던 장승들이 한 사람의 열정과 노력으로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생을 안동에서 살아온 토박이 김종흥 씨. '우리 것이 우리 땅에 서야 한다'는 그의 믿음은 92년 현재의 하회로 옮겨오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손수 제작한 장승을 하나씩 세우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250여 개의 장승이 모여 사는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장승은 식자문화와는 달리 서민층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빙어낸 문화입니다. 서민문화를 대표하는 고유의 민속문화지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장승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때가 제일 기분이 좋습니다."

한복을 차려입고 어깨까지 흘러내린 흰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나무망치와 끌로 장승을 깎는 그의 모습에서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장인의 혼이 느껴진다.

장승공원에는 김종흥씨의 정성이 담긴 장승이 제각기 모양을 달리하며 서 있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진서대장군, 북장군, 당장군 등 다양한 이름과 함께 우락부락한 인상이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장승에서 시골 아이마냥 천진하고 어눌해 보이는 장승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하나같이 표정이 신선한, 살아있는 것들이다.

전통적인 장승은 엄한 표정을 짓는다. 장승을 세우고 지내는 제사의 축문을 보면 '천하대장구, 지하여장군이 우리 마을의 잡귀와 악질을 막아주신 은혜에 보답코자 오늘 이 정성을 드리오니...' 하는 구절이 있다. 이처럼 잡귀와 제액을 방어하는 수호신의 역할로 인해 무서운 표정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인에게 쉽게 다가가고 이해될 수 있도록 다정하고 해학적인 모습의 장승을 만든다고 한다. 장승은 못 생기면 못생길수록 정감이 가고 재밌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렇다보니 장승의 표정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얼굴이 장승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김종흥 씨는 스치는 사람들의 표정이라도 쉽게 흘리지 않는다. 심지어는 꿈에서 보았던 표정도 재빨리 스케치해서 장승의 얼굴로 나타낸다.

신랑, 각시 모양의 장승, 하나의 나무에 각기 다른 2개의 얼굴을 가진 장승, 휘어진 재질을 적절히 이용하여 수줍음 많은 처녀가 기둥 뒤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 놓은 것 같은 장승 등 앙징맞은 장승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중에서도 하회탈 모양의 장승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가장 안동다운 장승이다. 안동이란 지역적 특징과 어우러져 장승의 고정관념을 깬 독창적인 것이다. 지난 4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을 방문했을 때, 김종흥씨는 1미터 정도의 크기에 양반탈과 부네탈 얼굴을 한 한 쌍의 장승을 선물해 안동의 새로운 상징으로 부각시켰다

장승공원의 장승들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데 재료로 쓰이는 목재도 한몫 한다. 장승을 만드는 데는 주로 사용되는 것은 소나무지만, 오랜 세월을 세워 두고 보려면 밤나무가 좋다. 장승에게서 생명의 향기가 풍겨지게 하기 위해 향나무를 사용하기도 한다.

김종흥 씨도 이런 좋은 재목으로 장승을 깎기도 한다. 그러나 장승공원에 세워진 많은 수의 장승은 길가에 버려진 나무를 가져다 만들었다. 그냥 내 버려두면 화목으로 쓰여 없어질 것들을 가져다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장승을 만드는 가장 큰 매력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데 있습니다. 작업을 하는 내내 나무와 대화를 나눕니다. 완성을 해 놓고서도 볼 때마다 서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지요."

그가 나무와, 장승과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그 자신 외에 아무도 모른다. 허나 분명한 것은 그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 장승들은 장승공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는 것이다. 안동하면 하회탈만을 생각하고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장승공원은 또 다른 볼거리요. 반가움이다.

지금 터 잡고 있는 장승공원은 주위 환경도 장승을 전시하기에 미흡하고, 무엇보다 장소가 협소하다. '더 넓고 아늑한 곳에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것은 김종흥 씨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이곳을 다녀간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다.

만약 이 세상 어딘가에 꿋끗한 장승들의 마을이 있다면 기어이 찾아가리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한국 문화의 향기가 베어있는 안동으로, 장승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글/오주환, 사진/김휴근
[ 세기말 밝힌 희망의 등대지기 ]

<'새뚝이'란 춤판 등에서 현실의 판을 깨고 새 장을 여는 사람을 말한다. 새로운 활동을 통해 사회의 나갈 방향과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문화운동가 백기완씨가 처음 찾아내 쓰기 시작한 말이다. 중앙일보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각 분야에서 독특한 업적을 세운 인물들을 선정했다. 99년 새뚝이들의 면면을 사회분야부터 살펴본다.

4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경북 안동 방문은 춤꾼 김종흥(44) 씨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승복 차림에 여자처럼 긴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으로 하회탈춤을 뽐낸 뒤 여왕과 나란히 축배를 들었다. 그 모습은 매스컴을 통해 전세계로 전파됐다. 덕분에 '지방문화'를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이 됐다. 김씨는 '전통문화 전도사'역을 자처하며 영국 여왕의 방문을 계기로 하회탈춤과 안동을 세일하는 일에 매달렸다. 토*일요일엔 하회마을에서 상설공연을 펼쳤고, 서울로 부산으로 이틀이 멀다 하고 원정공연을 했다.
그의 노력으로 하회마을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도 잦아지기 시작해 지난해에 비해 3배가 넘는 1백만명이 이곳을 찾았다. 새해에는 영국*일본 등지에서 하회별신굿놀이를 펼칠 예정인 그는 "전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전통문화가 지방에 얼마든지 묻혀 있다." 며 세계로 향한 우리 문화에 자신감을 내 보였다.
송의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