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하회 마을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채 다양한 양식의 살림집들이 현존해 있다. 솟을 대문의 양반가옥인 양진당,충효당,북촌댁,주일재,하동고택 기와집 과 서민 가옥인 초가들이 길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학문 탐구를하던 옥연정사,빈연정사,겸암정 등의 정사, 인재 교육의 병산 서원과 화천서당 등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다.
하회 마을 태생의 류종혜 공, 대유학자 겸암 류운룡(1539-1601) 선생,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우신 영의정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 등 많은 인물이 배출 되었다. 그래서인지 영남의 반촌으로 하회 마을을 꼽게 되었다. 하회 마을의 훌륭한 자연환 경은 민속 놀이에 있어서도 마을 사람들에게 유달리 풍부한 감성을 갖게 하였다.
수많은 문화 유산을 지켜온 하회 마을의 놀이 가운데 서민들의 하회별신굿 탈놀이와 양반들이 즐 겨 놀았던 선유줄불놀이는 양반과 서민의 문화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한다. 서민들에 의하여 연희되었던 하회별신굿 탈놀이와 양반들의 선유줄불놀이는 음력 7월 16일에 놀이되었다.
위처럼 선조들의 소중한 삶의 자취와 생활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하회 마을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마을로서 중요 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물이 돈다' 이름하야 물돌이, 그래서 하회마을이다.
빼어난 지형적인 조건을 갖춘 하회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를 밝혀줄 문헌이나 기록이 업서서 자세한 내력은 알 수가 없지만 마을에서 구전되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향언과 하회탈의 제작에 얽혀있는 허도령의 애듯한 전설로 미루어 대개 고려시대 초기로 알려져 있다.
초기 마을릐 형성은 가장 먼저 입촌하여 터를 잡은 허씨들에 의해서이다. 허씨들은 화산자락의다뜻하고 양지바른 거먹실골에 자리잡았으며, 그 뒤를 이은 안씨는 향교가 있었다고 전하는 향교골에서 모듬살이를 영위하게 된다. 현재와 같은 하회마을의 모습은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러 풍산류씨 공조저서 류종혜 공이 풍산 상리에서 길지를 찾아 이곳으로 옮겨온 후부터이다.
마을의 구성은 화산의 얕은 능선을 따라서 길이 나고 그 길을 중심으로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어진다. 이 마을의 건축물들은 능선과 길을 등으로 하고 밖으로 향하여 지었기 때문에 동서남북향의 모든 좌향이 나타나는 특색을 보인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좌향의 건물일지라도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가 강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줄 뿐만 아니라 앞이 시원스럽게 트이고 강물이 흐르는 풍치를 즐기기 위함에서이다.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순응하여 그 속에 동화도고자 하는 선조들의슬기로움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하회마을의 지형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어떻게 보면 적으로부터의 침입을 훌륭히 막아주는 천애의 요새이고, 또 어떻게 보면 낙동강물이 포근히 감싸고 도는 아담한 마을이다. 물은 S자형으로 돈다. 비슷해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헬기에서 못 보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S자가 분명히 보인다. 어쨌든 그 덕분에 '태극'을 닮았다고도 하고 물위에 연꽃이 피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단다.
강가는 백사장이다. 푸른 바닷물을 생각하면 함께 떠오르던 흰모래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함께 음미하는 맛 또한 새롭다. 근데, 이것이 무언가? 강 저쪽으로 근엄한 절벽이 위세를 자랑한다. 부용대, 연꽃을 바라보는 전망대인가 ? 부용대에 오르면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실은 여길 오르고 나서야 하회의 지형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낄 수 있었다.
이 마을의 유래는 상상하기 어려운 옛날 옛적이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얘기에는 '허씨'가 제일 먼저 나온다. 허씨가 터를 잡았단다. 그리고 안씨가 집을 짓고, 류씨가 판을 벌렸다고... 하회에 처음 입성한 분은 류종혜공이다. 의정부라면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이었고, 의정부 밑에 공조에서 벼슬하셨던 분이다. 하지만 하회마을은 다른 두 형제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형인 겸암 류윤룡공과 동생인 서애 류성룡공은 하회마을을 빛낸 형제이다.

이 분들의 흔적을 살릴 수 있는 곳이 충효당과 양진당이다. 류성룡 공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권율을 등용하여 왜적을 물리친 얘기는 너무도 잘 알려졌다. 충효당안에 양모각이라고 류성룡공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곳에서 공의 성품과 위엄이 느껴진다. 임진왜란을 상세히 기록한 징비록과 평상시에 쓰던 너덜너덜한 갓, 국가가 위기에 처해 모든 권력을 류성룡 공에게 넘겨주겠다고 기록한 왕의 비밀 문서, 이 모든 것들이 재상으로서의 류성룡 공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리고 그 분을 흠모하던 선비들이 공이 돌아가시고 난 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충효당이다. 큰집 며느님인 박필술 할머니도 '충효'사상만으로 가문을 말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하신다. 형님인 류운룡 공의 대를 잇는 며느님인 김명규 할머니에게선 한 집안의 어머니로서의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큰 댁 맏며느리는 집안 일에 있어선 대통령과 같은 역할을 해야 했다. 가족도 많고 친척도 많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먹는 것만도 한 교실에 있는 학생들 이상을 먹여야 하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애정을 보일 수 없는 그런 고충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한 기록에 보면 경상도에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8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안동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800여명, 우리나라의 운명이 하회마을에 달려 있었다라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얘기일까?
류성룡공이 징비록을 집필했다는 옥연정사에 가기 위해 먼저 중리에서 갈라져 광덕교를 지나 부용대(양반들의 놀이인 선유줄불놀이가 여기서 행해졌다. )에 올랐다. 부용대는 하회마을을 바라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높지는 않은 산이었지만, 절벽이 그러하듯이 아래 보이는 낙동강들이 아찔하였다. 하지만 하회마을의 좋은 경치에 노래 하나 불러봄직하다. 옛사람들이 그런 기분에 읊은 것이 시 한수니 누구나 부용대에 오르면 입들이 간질거리나 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예고편이었다. 올라온 반대쪽으로 부용대를 내려가다 보면 겸암정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겸암정에서 옥연정사까지 지름길이라고 사람 하나 다닐 만한 절벽길을 따라 옥연정사로 향했다. 혹시 징비록을 쓰는 도중,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이 절벽길을 조심조심 걸어가지 않았을까? 길은 참으로 위태로웠지만 아찔한 가운데에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고요한 하회마을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작은 시냇물은 방정맞게 흐르지만 긴 낙동강은 누가 빠져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을 듯 넘실넘실 잘도 흐른다. 이것이 당시 양반의 정신이었다.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고 전체를 생각하고 눈앞의 사물만을 바라보지 않고 먼 산너머의 일을 차분히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늘 절벽에 서 있는 마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국여왕의 방한은 우리에게 반성의 시간을 주었다. 만약에 영국여왕이 우리나라 사람 중 누군가에게 한국을 대표한 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손꼽을 것인가? 다른 많은 것들을 꼽을 수 있겠지만 하회마을을 생각하면서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저하지는 않은지? 영국여왕의 방문 이후 갑자기 늘어난 관광객이 외국인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지척에 두고 외면해 오다가 이제야 알게 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또한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냥 옛날 것으로만 기억하고 있다면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안동시에서는 하회마을을 관광명소 조성과 급증하는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마을보존, 정리 등 많은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그리고 하회를 방문하는 우리는 공중도덕을 지키며 마을에 스며있는 우리의 옛것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외국인에 의해 한국의 얼굴로 인정된 하회마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새삼 뭉클하게 다가온다.